어떤 여유로움

김광민이라는 피아니스트를 알게 된 건 오래 전 일이다. 밤 열두시가 넘어서야 하던 M본부의 수요예술무대의 어눌한 진행자의 모습을 보기 전에도 나름 알아주는 음대라는 버클리음대를 졸업한 국내에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 중에 하나라는 정보 쯤은 얼핏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워낙에 취향이 저렴한 까닭에 김광민은, 그리고 피아노는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맘 한 구석에 어려서 못배운 피아노에 대한 동경과 질투가 싹 터 있음을 인정한다면, 피아노는 그냥 반주나 맞춰주는 곁다리 악기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인정해야 겠다. 어눌한 그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에 홀리거나 미치거나 빠지지 않고서는 드러날 수 없는 어떤 광기가 엿보였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의 앨범을 다운 받아 들어야 겠다고 생각한건...
지칠줄 모르고 뿌려대는 비로 나날이 우울해지는 기분 때문...쯤이라고 해두자.

내가 선택한건 그의 다섯번째 앨범 'Time Travel' 이었다.
제목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음직한 익숙한 곡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창작곡은 아닌 모양이었다.
퇴근길 이어폰을 찾아 꽂고 다운로드 받아 놓은 김광민의 앨범을 들었다. 이런... 이건 너무... 좋은 건 아니었다.

거기엔 세상을 거리를 둔 채 관조하는 자의 어떤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의 연주는 속삭였다. '세상 사는거 피곤하고, 따분하지? 그런데 어쩌겠지 사는 건 다 그런거야... 우울하다고 해도 여유를 가져봐. 때론 느리게 사는게, 조금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침잠하는 게 삶을 즐기는 기술이야...' 라고.

왜 그가 인정 받는 뮤지션인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얼핏 스치던 광기는 삶을 이해한 자의 여유로움 같기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앨범 제목 Time Travel.. 시간 여행. 그가 말하는 시간 여행이란 과거로의 혹은 미래로의 여행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아 숨쉬는 바로 지금의 시간을 여행하듯 그렇게... 흘려보내라는 얘기인 것 같았다.

by 취생몽사 | 2007/08/14 18:16 | 일쌍多반사 | 트랙백 | 덧글(0)

<달콤한 나의 도시> | 정이현, 2006

<달콤한 나의 도시>의 주인공 은수는 서른 한살(에서 서른 두살이 되는)의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여성이다. 제도로서의 결혼을 경멸하지도 동경하지도 않지만 그녀 자신 그 제도속에 몸을 빼낼 재간이 없음을 깨달은, 세상을 아직 다 알지도 그렇다고 이러타할 세상에 대한 용기도 없는 어쩔 수 없는 어중간한 평범(?)한 인간이다.

7살 연하와 동거를 해보기도 하고 오랜 친구로부터 인간대 인간으로 함께 살아보자는 제안을 받기도 하고, '튀지 않음'으로 무장한 남자와 결혼직전에 이르러 사실은 '튀지 않는' 남자가 아니라 '튀고 있는' 남자였음에 어이로부터 뺨을 맞기도 하는 그런 인간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쉽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은수를 나는 많이 닮았다.

은수와 은수를 둘러싼 친구들 가족들 직장동료들 등등은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외롭고 상처받은 존재임을 증명하며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오롯이 혼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아야만 살아있음을 깨닫는 존재. 특별한 꿈이 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종국에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닫고야 마는 존재들...

<달콤한 나의 도시>는 은수와 은수의 도시를 유쾌하게, 그러면서도 가볍지는 않게 그려내고 있다. 하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이란 도시... 짐짓 무겁고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모습이 크게 다가오지만, 알고 보면 카카오 72%처럼 흐리멍텅하게 쌉싸름하면서도 꽤 달콤한 도시다...

by 취생몽사 | 2007/08/13 23:45 | BookIsMyLife | 트랙백 | 덧글(1)

1995년 8월 15일 화요일/광복절

12시에 눈을 떴다.(물론 중간에 가끔 깼지만...) 통일로에서 데모대가 있었단다. 그래서인지 채류탄이 코를 찔렀고, 기침도 몇 번 했다. 김영삼 어쩌구들 한 모양이다. 나도 물론 이 아저씨는 맘에 안 들지만 지들이 하면 얼마나 더 잘 하겠는가? 권력에의 욕심이 얼마나 인간에게 큰 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오늘도 당구장에 갔다. 10일째다. 드디어 꽉 찬 30이다. 물오십도 멀지 않다. 공부하고는 담싼지 한 달이 되어 가는 것 같다. 그 것도 방학이라는 귀중한 시간동안 말이다.

외로움에 대한 시를 한 편 썼는데 맘에 들지 않는다. 제목은 '고독에의 찬사'다. 내일 다시 써봐야지.
난 오늘도 생각한다.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하고. 누군가의 시가 떠오른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송창식이 노래로도 불렀었다.

6일 남은 방학. 과연 어떻게 보낼지 걱정이다.
내일은 꼭 성훈이한테 편지를 붙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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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나는 당구실력이 꽉 찬 30이었고, 2007년 지금의 나는 나이가 꽉 찬 30이다.
어줍은 사랑타령으로 시를 쓰고 혼자 감탄하던 모습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성훈이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 있던 불알친구. 연락이 끊긴지 오래됐다. 보고싶다...

by 취생몽사 | 2007/08/13 23:14 | 십년전의 일기를 꺼내어 | 트랙백 | 덧글(1)

<달려라 아비> | 김애란, 2005


김애란의 소설집 <달려라 아비>는 재밌다.
글을 읽은 사람으로 하여금 웃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세상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묘사하는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에 고개가 끄덕여져 그렇고,
결코 밍숭맹숭하고 진부하게 끝이 나는 결말이 아니라 쿨하게 주인공을 혹은 화자를 텍스트로부터 탈출 혹은 분리시키는 힘이 그러하다.
아직 이십대인 작가의 재기가 느껴지면서도 범상치 않은 삶의 무게가 작품 곳곳에 베어 있다. 특히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연민, 아쉬움, 그리움 같은 것들이 자주 엿보이는데, 이러한 감정들을 '떠남'이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 여지를 남김으로써 풋풋한 희망을 내비친다.

그녀의 첫 장편소설이 기대된다...

by 취생몽사 | 2007/08/12 22:49 | BookIsMyLife | 트랙백 | 덧글(0)

1993년 9월 5일

14년전 내 일기장의 첫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죽여주게 좋은 날씨. 일요일.
고등학교1학년 또래보다 조금 늦게 사춘기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일기를 통해 내 고민과 욕망을 배설하기 시작한다.
사랑,,,믿음,,,가족,,,친구,,,돈,,,공부,,,희망,,,꿈,,,이런 것들을,,,
지금의 나를 형성한 것들.
조심스레 10여년이 지난 일기장을 들추어본다.
나는 얼마나 변했으며, 얼마나 나의 고민과 욕망에 대한 성취를 이루어 냈을까?
알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시절 나는 순수했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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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9월 5일 죽여주게 좋은 날씨. 일요일.

역시 예배후 농구를 했다.
2시까지. 용주집 위에서 말이야.
왜 이렇게 안 되는지 모르겠다. 폼이 잘 안 잡힌다. 게다가 형들은 나에게 거의 (95%) 패스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플레이는 소극적이게 되고 슛은 잘 안 들어 간다. 에잇!
LG가 OB를 이겼단다. 연장까지 가서.
오늘 교회는 연합예배를 드렸다. 석이가 단화에 목걸이(?)까지 하고 나타났다. (바보)
경한형제와 나는 순수한게 좋은 거라며 석이를 꾸짖었다.
중등부 주최라서 인하가 피아노를 치고, 수경이가 찬양을 드리라를 했는데 역시
현준이가 피아노를 잘 치고, 영인이가 인도를 더 잘 하는 것 같다. 아! 영인이는 결석을 했다.
하지만 재호는 2주 만에 함께 공과 공부를 했다. (약 5분)
중둥부가 41명이다. 충격! 열심히 전도를 하였으면 좋겠다. 고등부도.
내머리는 언제나 자라려나!!

by 취생몽사 | 2007/07/26 00:33 | 십년전의 일기를 꺼내어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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